KOOSOO ⓒ 2020
전시라는 사회
권혁규 (전시기획자)
내가 발 디디고 있는 곳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것. 그것은 미술의 오랜 가능성이었고 동시에 지병이었다. 근대에서 오늘로 이어지는 시간 동안, 미술은 늘 자기부정의 언어를 만지작거리며 선언과 고백을 이어왔다. 그 자기부정은 미술을 위한 미술이 되어 모더니즘을 관통했고 다시 비/미술의 미술(들)을, 외부와 타자를 환대하고 반추하며 현재에 안착했다. 흡사 절름발이의 진보 같은 이 현대미술의 이동은 어떤 가능성을 제시해왔는가. 특정 입장의 내부에서 시작된 외침은 다른 입장에, 외부에 전달되었는가. 자책감을 들이키며 성장하던 현대미술은 이미 비대한 환멸의 덩어리, 자기부정의 흉터로 가득한 폐허가 되진 않았는가.
미술 제도에 질문을 던지는, 말 그대로 자신이 서있는 곳을 의심하는 구수현의 작업은 자연스럽게 위 질문과 사고를 대동한다. 구수현이 의심의 대상이자 부정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바로 ‘전시’이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구수현은 여러 미술 제도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하는 사건으로서 전시를 인지하고 그것의 조건인 공간, 작품, 작가, 관객 등이 작동하는 방식을 전복하거나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개별 작품의 구상이나 제작은 물론 작품이 관객과 접촉하고 맥락을 생성하는 사건-전시 자체를 창작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전시를 매체로 삼는 작업의 방법론은, 그러니까 일종의 큐레이팅 행위를 전제로 하는 창작은 60년대를 기점으로 시작된 포스트 스튜디오 작업과 연결해볼 수 있다. 전통적 개념의 작업실에서 탈주한 작가들은 기존 작업과 창작 방식의 한계를 실험하며 장소(site), 작업(artwork), 기관(institution) 등의 개념을 재고하고 확장하였는데, 그 일련의 시도들은 동시대 큐레이팅의 방법론과 분명한 접점을 형성한다. 실제로 동시대 큐레이팅의 역사에서 (물론 동시대 큐레이팅의 역사는 - ‘history of contemporary’ curating은 - 그 말 그대로 모순을 지시한다) 로버트 스미슨(Robert Smithson)과 마르셀 브로테아스(Marcel Broodthaers)와 같은 작가들의 작업은 신화화된 몇몇 큐레이터들의 전시보다 더 유의미한 지점을 차지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앞에, 더 크게 두냐가 아니라 60년대를 기점으로 현대미술을 관통해온 자기부정의 언어가 전시를 매체로 발현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70~80년대 제도비평과 90년대 관계미학으로 이어진다. 여기에 90년대 독립큐레이터들의 반큐레이팅(para/anti-curating)적 전시들까지, 기존 관리와 수사의 문법에서 벗어난 전시와 창작의 방법론은 지속적으로 진행되어왔다.
그럼 다시 처음 질문으로, 구수현의 작업으로 돌아가 보자. ‘동시대의 역사’, ‘반큐레이팅적 전시’와 같은 말들이 지시하듯, 모순과 위악을 내재한 창작과 기획의 방법론은 미술의 오랜 언어를 전시로 재생한 것 이외에 어떤 가능성을 남겼는가. 어쩌면 이미 너무 많은 고백을 했을지 모르는 미술의 자기부정은 전시 매체로 부활하여 큐레이팅의 무분별한 확장, 스타일만 남은 비전시의 전시라는 우울한 봉합의 풍경을 남기지 않았는가. 그럼 오늘, 한국에서 비슷한 방법론을 취하는 구수현은, 할 말을 다 한 뒤에 나오는 단어들, 그 목소리의 공허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그의 작업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여기서 특정할만한 점은 앞서 언급한 이전 미술의 사례들이 자기부정을 주로 상징체계 안에서 혹은 매체적 속성 안에서 구현하며 그것의 가치를 전승하려 했다면 구수현의 작업은 전시와 외부 세계가 교차하는 지점에 더욱 집중하며 미술 제도와 사회현상을 직접적으로 포개놓으려 한다는 것이다.
최근 작업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먼저 2016년 개인전 <컬렉터의 비밀 창고 A Collector’s Secret Storages>에서 작가는 을지로 세운상가 일대의 사무실과 창고 6곳을 단기 임대해 가상의 인물, 현대미술 컬렉터를 공간 주인으로 설정한 뒤 나름의 컨셉에 따라 각각의 공간을 채운다. 초대받은 관객은 주어진 가이드북을 따라 미로 같은 건물을 헤매다 각 방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 전시 혹은 작품이라고 이름 붙여진 상황을 마주한다. 방은 창고이고 도서관이다. 딱히 작품이라 할 수 없는 가구와 좌대들, 책과 나무 크레이트들이 채우고 있어 사무실 같기도, 쇼룸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같은 설정은 일반적인 전시에서 경험할 수 없는 환경(좌대, 포장, 보존, 말과 글, 커피와 술 등)과 함께 미술작품의 이면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또 다른 미술의 이면이 존재한다. 관객은 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오래된 건물을 돌아다니며 예상치 못한 현재를, 다양한 삶의 풍경을 마주한다. 관객은 철 냄새 가득한, 굉음과 분진이 날리는 곳을 지난다. 모르는 누군가에게 길을 묻다 대화를 하고, 비 오는 창밖 도심을 느긋하게 내려다봤을지도 모른다. 1960년대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 아파트로 지어져 전자 재조 산업의 메카로 역할했던, 많은 것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런대로 돌아가는 그곳에서 다양한 현재를 관찰하고 과거의 미래를 떠올리다 미술 제도의 작동과 도시 개발 원리를 연결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전시에 사회를 투영하려는 시도는
구수현은 자신의 작업을, 특히 앞서 설명한 <컬렉터의 비밀 창고 A Collector’s Secret Storages>를 ‘취향과 안목에 대한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나아가 전시를 ‘직접 경험하면서 얻어지는 감각적 이해, 사소한 사건으로 만들어지는 개인적인 인상’의 공유라고 말한다.(2016년 작가노트 중) 같은 맥락에서